
근사한 님의 블로그에서 감상평을 보고 바로 주문한 작품이다.
아침 먹고 주문 / 점식 먹고 나니 도착 / 저녘 먹고 난 후 감상시작 / 11시경 완독
으로 하루만에 모든 과정을 마쳤는데 굉장히 만족스러워 근사한 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명민한 독자 여러분들께서 표지를 보자마자 알아차리셨듯이 이 책은 일본 경찰소설이다.
은폐수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경찰소설이나 경찰 드라마에 많이 접해보신 분들이라면
거의 자동적으로 어떤 도식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연쇄살인사건 발생 -> 논캐리어 형사인 주인공의 끈질긴 수사 -> 용의자 발견 -> 다분한 스캔들 가능성->
보신에 급급한 캐리어들의 히스테리 / 압박 ->궁지에 몰린 진실과 주인공 -> 대역전! 정의는 승리하였도다!!
적어도 필자의 뇌내에서는 은폐수사라면 자동적으로 이런 흐름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
이 플롯이 경찰을 불신하는 시민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이미 수십번이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먼저 주인공은 무려 캐리어 경찰관료!! 혹시 여기서 야쿠시지 료코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가?
필자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캐리어지만 현장중시형, 탁월한 능력으로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손에
쥐지만 상부의 압박에 고뇌한다... 라는 비교적 덜 진부한 전개! 주인공이 캐리어라는 것을 알고 이 책을
손에 쥐기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인물상은 이거였다. 하지만 나의 이런 예상은 완벽할 정도로 빗나가 버렸다.
주인공인 류자키 신야는 경찰청 장관관방 총무과 과장 님이시다.
경찰청 과장의 계급은 경시장, 한국 경찰으로 따지면 치안감, 군대로 따지자면 준장 정도에 해당한다.
그 말인 즉슨 이 양반은 현장이랑은 눈꼽만큼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애초에 경시청 소속도 아니다. 같은 경시장이라도 수사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권한이 있는 도쿄도경시청
형사부장이나 지방 현경본부장과는 그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예상은 무례할 정도의
직격탄을 맞고 기분좋게 넉다운 당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인 류자키 신야는 엘리트 코스 한 부분을 잘라와서 의인화시켰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캐리어 경찰관료
그의 일상에 불쾌한 잡음이 섞여든다. 계기는 바로 티비에서 방송되고 있는 살인사건에 관한 뉴스였다.
그는 자신에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며 조금 일찍 출근, 그리고 그 피해자가
"1980년대 말 아다치 구에서 일어났던 유괴 강간 폭행 살인 시체유기 사건"의 가해자 중 하나였음을 뒤늦게 알게된다.
※ 무지 길게 써놨는데 이게 그 유명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다. 간단히 적자면 인면수심의 쓰레기 4명이
여고생을 한명 납치해서 강간 폭행하고 그 밑에 있던 개새끼들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는데 그러던 중 결국 그 여고생이
죽어버렸다. 그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고심하다가 시체를 드럼통에 넣고 콘크리트를 넣어 매워버린 후 매립지에 갖다
버리는 것이다. 이런 범행을 저지르고도 유유작작 여전히 망나니 짓을 하며 살다가 그 일당 중 한명이 전혀 다른 건으로
취조를 받다가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면서 일당이 전원 체포되었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범인 전원이 미성년자
였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일본 전역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당시 일당의 우두머리였던 쓰레기를 제외하고
현재 전원 형을 마치고 출소했다.
피해자가 현재 폭력조직 소속이며 살해흉기가 권총이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경찰은 조직간 분쟁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
과거 사건과의 연관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피해자의 관련정보를 매스컴에 공표하는 일 없이 그냥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류자키는 "관료적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면서 독자들을 내심 분노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건이 일상속에 파묻히려던 찰나
과거 사건의 가해자가 또 한명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훨씬 민감한 연쇄살인사건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이 소설의 매력은 전적으로 이 류자키 신야라는 캐릭터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작중 초반 엘리트 의식과 보신주의에
사로잡힌 관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독자들은 절대로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존재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 별종 캐릭터의 매력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엘리트 의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엘리트 의식은 상당부분 '의무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대중들은 매스컴에 좌우되는 사고력도 없는 존재이며 자신들만이 옳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그는 모 외무성 관료처럼 "나는 선택받은 인간이니 우민들의 세금 몇억엔 정도 쓴들 뭐가 잘못이냐!"라는 식의
저질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국록을 먹고 있으니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가 집안일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긴 것도 이런 나랏일에 전력을 다하려는 의무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직위에 강렬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권한" 때문이다. 즉 신분상승의 면보다는
권한의 증대와 그로인한 조직의 효율 증대를 사랑한다. 그의 이런 정신구조의 독특성이 그를 단순한 '선민의식에
찌든 보신주의 악덕 관료"라는 틀에 집어넣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종'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자들보다 훨씬 그에 적합하다.
그는 여려모로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며 그렇기에 오해받는 일이 잦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관료의 모습 중 한 면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경시장에서 경시정으로 강등당하긴 했어도 2,3권에서도 여전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하니 반드시 읽어볼 작정이다.
ps. 권말 인터뷰를 보니 이제는 플롯을 짜두지 않아도 캐릭터만 제대로 잡아놓으면 자동적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고
하던데 정말 딱 그런느낌이었다. 이렇게 독특하고 매력넘치는 캐릭터를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할 따름이다.
은폐수사 2,3권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 신작 주문하면서 원서도 같이 질러버려야겠다~~
ps2. 경시장을 처음엔 경무관이라고 했다가 치안감이라고 고쳤는데 이게 조금 애매하다. 한국의 치안감이면 지방경찰청장
이나 경찰청 국장급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일본의 경시장은 경찰청 과장급이고 국장급은 경시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무관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뭐 애초에 계급 수도 다르니까 그냥 적당히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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